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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강국, 허약한 디지털 리터러시

by 산골 피디 2021. 12. 27.

디지털 강국, 허약한 디지털 리터러시

유튜브 채널 단희TV캡처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 능력은 디지털 시대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읽기 능력입니다.
그런데 전 국민 대부분이 인터넷에 익숙한 한국 학생들은  눈에 띄게 부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평균 점수에 가려진 한국 학생들의 디지털 정보 판별 능력이 세계 수준에 비해서 많이 뒤처져 있습니다.

주어진 교과서를 읽고 정보를 찾아 문제를 푸는 기술은 좋지만,

실생활 속에서 정보를 통해 어떤 것의 실체를 파악하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적, 순위, 입시에 치인 많은 아이들이 디지털 세상을 가장 빨리 준비한다고 하지만

학교는 그들이 리터러시를 누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을 학교가 제공해 주지 못했을 때,

이는 단지 어떤 학생, 한 개인의 학습 기회를 박탈했다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세대가 미래의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해서 사회에 참여하는 기회 자제를 박탈하는 사회를 망치는 일입니다.

그 형태와 운영 방식이 무엇이든 학교가 제대로 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학교는 한 개인이 미래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적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학교는 어떻습니까?
학교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초적인 읽기와 쓰기, 경이로운 리터러시의 경험과 앎의 체험을 도외시합니다.

외우고 풀고 시험을 봅니다.
줄을 세우고 순위를 만들어 경쟁시킵니다.

시험에서 100점 받는 것, 반에서 일등 하는 것,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학교에 가는 것은 삶의 목적, 시민의 지향점이 될 수 없습니다.

좋은 학교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도구로 그 가치가 인정되면 충분합니다.
읽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기회입니다.

읽을 수 있는 기회, 더 잘 몰입해서 읽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양질의 자료를 가지고 몰입해서 공부하면 슬슬 자신감이 생깁니다.

 


자신감은 자동차의 배터리 같은 것입니다.

조금 더 어려운 글을 읽고 조금 더 잘 읽는 법을 배우고 싶은 마음의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독자로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겨야 합니다.

또, 한번 시동이 걸린 자동차가 여러 시간 동안 달리려면 연료가 필요합니다.

수준에 맞는 흥미로운 책, 시간이 아깝지 않은 효과적인 지도와 안내,

학생과 교사, 아이와 부모가 서로를 아끼는 분위기 등이 갖춰진다면

계속 읽고 싶어지는 마음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인내심도 생기고 지구력도 생깁니다.

홀로 서는 독자가 되는 행복한 경험입니다.

교과서는 교육과정의 취지를 잘 살려 가르치라고 만든 하나의 학습 자료입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 교실에서는 교과서 외우기와 시험 문제 풀이가 주된 일이 되었습니다.

매 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사이사이 단원평가, 수행평가가 줄줄이 있습니다.

 


시험 문화에서는 성적에 들어가건 생기부 (생활기록부)' 입력 사항이건

시험 문제를 풀어 정답을 찾아내는 일이 학생의 능력이며, 그걸 가르치는 이 학교의 사명입니다.

시험의 기술을 터득한 똑똑이들은 이미 유사한 문제 풀이를 했으므로 문제를 확인하고

정답을 예측한 후에 그 틀에 맞추어 주어진 글을 읽는 신공을 발휘합니다.

이런 놀라운 기술의 효용과 가치는 그에 걸맞은 시험 점수로 돌아옵니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경험하는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읽고 쓰는 일과는 한참 거리가 멉니다.

읽고 쓰는 일은 텍스트와 나의 지식을 통합하여 능동적으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학교의 교과서 읽기처럼 텍스트를 하나의 정보로 치환하여 줄줄 외는 일은

낮은 수준의 수동적 읽기입니다.

반복적으로 수동적 읽기를 경험하고 수동적 읽기에 스스로 만족하게 되면,

수동적 읽기가 최상의 읽기 방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시험에서는 수동적으로 읽어도 점수가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수동적으로 읽으면 한숨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현실세계의 복합적 문제 상황은 예외 없이 능동적이고 창의적이며,

분석적이고 실용적인 읽기를 요구합니다.

 

이 점에서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학교라면,

우리의 학교는 '공교육'이라기보다는 '빈 교육에 가깝습니다.

수고는 많이 했는데 딱히 보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반드시누구의 잘못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고도 열에 아홉은 대학에 가니 말입니다.



정답을 맞추기 보다 해답을 찾아가는 교육

 

시험 준비를 해 주지 못하는 학교에 심히 화가 난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각종 온·오프라인 학원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학원에서는 제대로 읽고 쓰는 일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읽지 않아도 정답만 찾으면 되는 끼워 맞추기식 사고에

'진짜로 읽는 일 따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대 또는 동네 최고의 달변가 선생님이 학생들을 위해 아이들 대신 친히 가짜로 읽고 씁니다.

학원이라는 공간에서는 읽는 방식에 정해진 답이, 쓰는 법에 특별한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학생과 학부모, 교육자 모두가 똘똘 뭉쳐 시험이라는 목적지로

단체 행군을 하는 중에는 모든 글을 최대한 잘게 썰어 읽어야 합니다.

시험 상황에서는 시험의 지문과 제재를 저미고 다져서 해체하는 것이

읽기의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원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문제없습니다.


으깨진 것들을 먹어야 체하지 않고 소화도 잘 되니

원래 무얼 먹기로 했든 크게 상관없는 것입니다.

'인강(인터넷 강의)을 듣고 내가 뭔가 이해했구나!'
라는 느낌이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가짜 읽기가 발휘하는 환각성은 요즘 유행하는 어른들을 위한 '인강(인문학 강의)'에서도 나타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지 않아도 그걸 읽어 주는 강의를 들으면 마음이 우아해지면서

서양 고전을 스스로 찾아 읽는 고상한 사람으로 변신합니다.

한글로 된 《맹자》와 《논어》를 손수 찾아 읽지 않아도,

잘 정리된 동영상 강의를 꾸준하게 들으면 인생을 통찰한 어른이 됩니다.

남이 요약해서 이미 다 풀어진 말들을 듣고서

내가 직접 원전을 찾아 능동적으로 글을 읽고 엮어 배웠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니 인터넷 강의들이 내거는 '공부하자, 독서하자, 배우자, 알자!'라는 구호는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사교육, 출판업, 인문 콘텐츠 사업을 하는 회사들이 최근 앞다투어 뛰어들고 있는

이런 종류의 강의 비즈니스에서는 콘텐츠 소비자가 정신 차리고

도스토옙스키와 맹자와 《논어》를 지나치게 열심히 찾아 읽는 일이 광범위하게 발생할 때

오히려 사업을 접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쉽게 얻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되지만,

지식이란 주민등록번호처럼 주민센터에 신고하여 취득할 수 있는 신분증이 아닙니다.

지식은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핵심 과정이 읽기입니다.
읽기란 남이 쓴 텍스트와 나의 지식과 경험을 연결하여 새로운 이해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일종의 정체성 형성 과정입니다.

 

 

 


맹목적 성취가 이끄는 잘못된 읽기


고등학교가 필요한 것은 대학교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학교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도 필요합니까?

대학에 진학할 때는 생활기록부에 기록된 직업을 고스란히 자신의 장래 희망으로 가져갑니다.

가령,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1학년 때 교사,

2학년 때 중학교 교사,
3학년 때 중학교 국어 교사로 생활기록부형 진로를 결정해야 합니다.

 

기원과 효능을 알 수 없는, 학원에서 만들어 낸 마법의 입시 전략입니다.

교사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중학교 교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중학교 국어 교사가 어떻게 사람과 사회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지

깊게 고민해 본 학생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학생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라고 읽을 자료를 권해 주는 사람도,

실제로 별로 읽을 만한 자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장래 희망이 직업과 동격이 된 세상에서는 무얼 하는 사람'

'어떻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특별히 읽고 생각해 볼 이유도, 여유도 없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각종 시험 때문에 특별히 읽고 생각해 볼 겨를 없이 진로가 굳어집니다.

가령 중학교 국어 교사가 되기 위한 가장 수월한 방법은 국어과 중등교사 임용 시험을 치르는 것입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수업을 듣고 엄청난 경쟁률의 시험을 준비하면 됩니다.

시험 치르는 일에 별다른 고민은 필요 없으며, 노량진 학원은 필수 선택입니다.

 

대학교에서 아무리 창의적, 문제해결적 수업을 해도

노량진으로 갈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현실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분야에 종사할 것인가,

그 분야의 전문가란 어떤 사람인가보다

시험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가 더 큰 문제입니다.

이건 교수의 잘못도 학생의 잘못도 아닙니다.

학교와 대학이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직장에 들어갑니다.

직장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뭔가를 제대로 읽고 써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맞추기 어려운 큐브 퍼즐처럼 짜인 경쟁과 단절의 직장 문화에서는

내가 무엇을 읽고 쓸 때 누군가 함께 읽어 줄 것이란 기대는 사치입니다.

이를 악물고 스스로 깨지면서 읽지만, 한참 부족한 이해력은 잘 안 깨집니다.

 

생계를 위해서 하루하루 읽고 쓰는 일들을 밥 먹듯이 해도,

늘 이해가 되지 않는 회사 일들에 마음은 점점 더 허기가 집니다.

 

특목고와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입사한 초능력자도

사업의 목적과 맥락을 고려하면서 알맞게 글을 읽고 쓰는 일에는 무능력합니다.

어떤 사안에 관한 생각을 적어 보라고 하면 무력감과 자괴감이 먼저 찾아옵니다.

 


많은 직장인들에게는 당장의 일 처리를 위해

필요한 문서, 이메일, 보고서, 기안서, 계획서, 검토 자료, 참고 자료를 읽고 정리하는 일들이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고통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고통을 경험하는 본인도 힘들지만,

당장 성과를 내야 하는 동료와 상사 역시 고통스럽습니다.

일의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중언부언, 동문서답, 논점 이탈, 아전인수의 악순환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에게

창의와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적어도 16년 동안 가정,학교, 학원에서 그렇게 하면 된다고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대안이 뭐냐고 저에게 묻는다면,

직무에 맞게 읽고 쓰는 법을 회사에서 새로 가르치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소탐대실, 사후약방문을 원치 않는 기업의 리더십은

구성원들의 리터러시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용서적: 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조병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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