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슈머(Cherry-sumers)는 한정된 자원을 극대화해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알뜰소비 전략을 펼치는 소비자를 가리키는 조어로 김난도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 등이 펴낸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등장했다.
구매는 하지 않으면서 혜택만 챙기는 사람을 가리키는 ‘체리피커(Cherry Picker)’에서 ‘체리(효용을 광범위하게 일컫는 단어)’를 빌려와 소비자를 뜻하는 컨슈머(Consumer)와 결합해 만들었다. 우리말로는 ‘실속 소비자’ 혹은 ‘불황 관리형 소비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체리슈머 등장 배경
체리슈머가 등장하게 된 직접적 원인은 무엇보다도 경기 악화다.
YOLO'you Only Live Once'와 '플렉스(과시)'를 외치던 젊은이들이 하루아침에 실속소비'에 눈뜬 것은 전례 없는 인플레이션과 경기 불안에 대한 실제적 위협 때문이다.
2021년 한국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세대별 체감경제고통지수' 분석에 따르면,
15~29세 청년들이 느끼는 경제적 고통지수가 모든 연령대 중 가장 높았다.
체감경제고통지수는 미국의 경제학자 아서 오쿤 Arthur Okum이 고안해 낸 지표로, 실업률과 물가 상승률을 합해 계산한다.
15~29세의 체감경제고통 지수는 국내에서 이 지표를 집계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청년들의 실업률이 치솟고 소비자물 가가급등함에 따라 이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 고통이 심화된 것이다. 청년층이 이러한 난관을 타개할 방법은 체리슈머로 거듭나 한정된 자원을 극대화하여 200% 활용하는 방법뿐이다.
체리슈머 트렌드는 1인 가구가 주류가 되면서 작고 유연한 소비를 선호하게 되는 구조적 변화에도 기인한다.
최근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2022 행정안전통계연보'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1인 가구 비율은 40.3%로 사상 처음 40%를 넘어섰다.
이 덕분에 총인구수는 줄었지만 주민등록 세대수는 1.6% 증가하는 특이한 현상도 관찰되고 있다.
바야흐로 1인 가구가 지배하는 '1코노미 2.0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사실 저비용•고효율의 소비는 대가족에서 실천하기 가 더 쉽다.
가정 살림에도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기 때문에 가구 구성원 수가 많을수록 1인당 지출이 감소하 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TV• 냉장고• 세탁기 등 여러 사람이 함께 쓸 수 있는 물건은 식구 수가 많아도 굳이 여러 개를 장만할 필요가 없다. 100만 원짜리 냉장고를 4인이 사용하면 1인당 지출은 25만 원인 셈이다.
반면, 1인 가구는 같은 냉장고를 사더라도 그 100만 원 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
1인 가구의 소비지출 관리는 다인 가구보다 훨씬 어렵다.
이에 체리슈머는 철저히 1인 중심으로 재편된 살림 환경에서 적극적으로 소비지출을 관리해야 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낭비의 늪에 빠져버릴 수 있는 탓에 스스로에게 눈을 부릅떠야 할 필요도 커졌다.
쟁여두기보다는 작고 유연 한 소비를 즐겨왔던 1코노미 소비자들이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온 경기 불황을 만나 체리슈머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 세대라 똑똑해진 세대
한 인터뷰에서 "복권에 당첨된다면 뭘 하고 싶어요?”
질문을 받은 젊은 연예인이 답했다.
“저는 일단......, 대출받은 게 좀 있어서 그걸 갚고요”
멋진 외제차를 구입하겠다거나 세계 일주를 해보고 싶다는 대답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체리슈머의 주된 세대인 MZ세대는 저성장 시대에 태어나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로 알려져 있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이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다고들 하는데,
정작 성인이 되고 보니 내 집 한 칸 마련하기도 벅차다. 동시에 어릴 적부터 부모세대 덕분에 고급 경험을 많이 해온 터라 취향의 수준은 높다. 이처럼 욕망은 넘치지만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 삶을 사는 이들이 치밀한 재무 관리에 몰두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흔히 MZ 소비자의 소비 성향을 '욜로'나 '플렉스' 등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키워드로만 이들을 바라보면 오해하기 쉽다. 이 세대는 그 어떤 세대보다 현명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즐긴다.
자기 관리에 능숙한 세대답게 지출 관리에도 밝다.
30대 인기 재테크 유튜버 전인구 씨는 한 인터뷰에서 "흔히 '짠테크' 하면 외 식을 줄이고 집에서 식사하는 것을 기본으로 꼽는데, 나는 밖에서 간단히 먹는다.
집에서 요리해 먹는 시간과 에너지로 일을 한다.
난 시간을 절약하는 짠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MZ세대는 무조건 싸게 구매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을 알고 자신의 현재 경제 상황과 니즈 간의 밸런스를 찾아나간다. 자본주의에 능하고 영리한 소비에 도가 튼 이들의 성장이 체리슈머의 확산을 더 가속화하고 있다.
체리슈머는 자본이 부족하다고 해서 무조건 소비를 포기하거나 줄이는 수동적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정형화된 시간 공간. 단위에 굴복하지 않고 때로는 본인 스스로, 때로는 타인과 함께 창의적인 방식을 도출해 내며 자신의 욕망을 현명하게 관리해 나간다. 평소 먹고 싶었던 와인을 한 병이 아닌 한 잔만 사서 마셔보고, 구독하는 OTT의 계정을 타인과 공유하여 비용을 나누는 등의 소비 방식들은 모두 이러한 지혜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체리슈머를 향한 마케팅 소비전략
경기 침체에 따른 소비자들의 대처라는 시각에서 보면 체리슈머의 등장을 일시적인 변화로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추세에서 생겨난 현명한 소비 관리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경기가 좋아져도 계속 발전해 나갈 추세적 변화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면 기업은 체리슈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체리슈머를 불황 속에서 꼼수를 부리는 소수의 특이한 소비자로만 바라봤다면, 이제 그 생각을 바꿔야 한다.
공짜만 바라는 블랙컨슈머로 오인하거나 싸게 사기에 급급한 체리피커 소비자라고 간과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퍼주기식 할인도 해답은 아니다.
작고 유연한 소비를 원하는 체리슈머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똑똑한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심리학에 '문간에 발 들여놓기 전략 foot-in-the-door technique'이라는 재미있는 용어가 있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프리드먼 Jonathan Freedman과 스콧 프레이저 scott Fraser가 실험을 통해 처음으로 고안해 낸 것으로, 어떤 큰 부탁을 하기 전에 문간에 발만 먼저 들여놓듯 작은 부탁을 먼저 해서 허락을 받고 나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큰 부탁을 했을 때 더 쉽게 허락받을 수 있다는 일종의 설득 기법이다.
이를 체리슈머에게 대입하면 어떨까?
작은 샘플로 특정 제품을 경험하거나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특정 서비스를 경험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무언가를 한 번 경험한 체리슈머는 그 브랜드의 문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셈이다. 이는 브랜드의 친숙도 향상과 다른 상품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될 수 있다. 작은 경험이 일종의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어 이후 더 큰 구매라는 성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프리미엄 향기 브랜드 '탬버린즈'는 실속소비를 중시하는 체리슈머의 등장을 기회로 삼은 좋은 예다.
이들은 3,000~5,000원 상당의 샘플 키트를 카테고리화하여 상시 판매했다. 당시는 코로나19 사태와 경기 불안정으로 기업들도 고민이 깊던 시기여서 "누가 샘플을 돈 주고 사겠는가?”라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우려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었다.
찢어서 한 번 쓰고 버리는 비닐 패키지의 샘플이 아니라 틴케이스에 담긴 감각적인 패키지로 구성한 것이다.
소비자들은 SNS에 앞다투어 후기를 올리며 “샘플 키트를 이렇게 감성적으로 만들다니", 취향 저격이다" 등의 뜨거운 반응을 보였고, 새 상품 론칭 3일 만에 완판 행진을 이어나갔다. 작은 샘플이 주는 세련된 브랜드경험으로 봉인된 체리슈머의 지갑을 연달아 열게 만든 것이다.
이는 작은 신생 브랜드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대기업일수록 저가 라인이나 엔트리 라인을 구축함으로써 브랜드 친숙도를 높이고 제품 생태계를 탄탄히 만드는 전략이 필요하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최근 엔트리급 초저가 라인의 '갤럭시 A23 5G' 모델을 출시하며 체리슈머를 고객으로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갤럭시 S와 갤럭시 2 시리즈로 프리미엄 시장의 조명을 끌어오는 동시에 초가성비 상품으로 제품의 외연을 확대한 것이다.
유통업계에서는 소형화에 집중했다.
대표적으로 1인 가구가 많이 이용하는 편의점 업계에서는 가성비를 더한 소형제품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여기에 1+1 행사상품 마케팅까지 더 하고 있다.
GS25는 편의점 최초로 1만원 이하의 소금 숙성회 2종을 출시해 주목 받았다. 이외에도 여름철 20여종의 소용량 조각과일을 선보였다.
CU도 소포장 세척과일 3종(적포도, 청포도, 방울토마토) 혼합팩을 선보였다. 이는 작지만, 다양한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마트24는 순두부찌개, 감자수제비 등 1인용 밀키트를 판매했다. 필요한 만큼 구매하길 원하는 1인 가구를 겨냥한 상품이다.
체리슈머는 유연한 소비를 즐긴다.
장기적인 계약보다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단기계약을 선호한다. 여기에는 알뜰요금제가 있다. 기존 이동통신사의 망을 임대해 재판매하는 알뜰요금제는 계약 해지를 하더라도 위약금이 없다. 또한 서비스와 통화 품질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으면서도 가격이 절반에 가까워 소비자들에게 주목 받았다.
알뜰한 소비에서 중고거래 서비스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당근마켓은 최근 '같이사요'서비스를 선보이며 체리슈머의 공동구매 욕구를 저격했다. 공동구매는 특정 제품 등을 개인이 아닌 단체로 구매하는 방식이다.
당근마켓은 같이사요 서비스를 서울과 경기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오픈했다. 해당 서비스는 대량으로 사면 싼 물건을 이웃들끼리 모여 함께 구입하거나 배달 음식을 시킬 때 함께 시켜 배달비를 아끼는 등의 서비스다.
체리슈머, 매너 소비자의 덕목을 갖춰야
소비자의 역할이 다양해지고 있다.
소비자는 시장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구매자이자 사용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배분자이며, 최근에는 시장에 새로운 상품을 출현시키도록 돕는 창조자의 역할까지 맡고 있다.
이처럼 시장에서 소비자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소비자가 지켜야 할 기본적 책무도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불법과 합법 사이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소수 소비자들의 과도한 행동은 우려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기업과의 계약 내용을 무시하고 이용권을 다시 쪼개 되팔거나, 편법적인 꼼수로 가격을 지불하지 않고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행태 등은 분명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다수 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일 수 있으며, 시장 전반에 부정 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몇몇 소비자의 과도한 무지출 챌린지를 비판하며 '무지성 챌린지'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일 정도다.
'회사 탕비실 간식으로 끼니 때우기' 같은 몰지각한 무지출 행동이 많아지면서 등장한 신조어다.
절약도 좋지만 그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소비자 윤리'다.
소비자는 자신의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앞서, 계약을 준수하고 시 장 질서를 준수할 의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는 소비자가 소비의 주체성을 갖고 시장에서 종 횡무진 활약하는 시대가 됐다.
현대판 보릿고개를 넘어서고 있는 이 시점에서 체리슈머는 실속을 챙기면서도 소비자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매너소비자'의 덕목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불황으로 국가 경제 전체가 새 로운 변신의 계기를 모색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소비 자와 사업자가 힘을 합쳐 모두 공생• 공영하는 시장을 만들어야 할 때다.
출처: 트렌드 코리아 2023 (김난도 외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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