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은 협업에 가장 강력한 동기
열등감이 때론 나보다 뛰어난 사람과 협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동한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협업만이 살 길이다”라고 외치고 다니는 것은 내 부족함을 협업으로 메울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다.
열등감이 협업을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는 셈이다.
열등감이 협업에 도움이 되었던 가장 강력한 나의 경험(에피소드)를 공유하고자한다.
열등감은 메타인지력이다
피디로서 방송콘텐츠로 먹고사는 일을 한 지 20년을 넘겼다.
다큐가 됐든, 예능쇼 연출이 됐든, 뉴미디어 플랫폼 운영이 됐든...
나의 작업 영역에는 늘 나 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고 내 부족함을 자각케 했다.
첫 감정은 열등감으로 쓰라렸지만, 인정하고 나니 다음 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열등감은 피디인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메타인지력을 더 키워준 셈이다.
내가 못 하는 것에 집착 말고!
내가 좀 더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그게 내게는 프로듀싱이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피디 업무영역은 프로듀싱과 디렉팅으로 나뉜다.
편집실 밤샘도 너끈하고, 신선한 감각으로 폭풍 성장하는 후배들 앞에서 내 디렉팅은 퇴행의 길만 보였다.
콘텐츠의 생명줄인 펀딩을 통한 예산확보, 비즈니스 모델 수립, 콘텐츠 마케팅 같은 프로듀싱은
시간이 더해준 업력 덕분에 그나마 지역 피디인 내가 도전해볼 수 있는 영역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녹턴> 정관조감독이 그랫듯 다큐를 전문적으로 작업하겠다고,
안정된 방송사를 뛰쳐나갈 용기도 열정도, 10년 넘게 한 가족사에 천착하는 몰입 정신도 내게는 없다.
첨엔 정관조감독의이 겪는 힘든 제작 여건에 조그만 보탬도 되고,
내가 영화감독이 되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정감독을 응원하며 대리 만족하는 즐거움으로 시작했고,
그렇게 하다 보니 디렉터(감독)이 필요한 부분을 프로듀서가 채울 수 있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장에 몰입한 독립 제작 디렉터의 부족함을 메우는데는 촬영 현장을 한 발 벗어난 방송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았다.정부자금지원, 인적 물적 네트워크 활용, 마케팅 홍보, 저작권 권리관계 등...
그렇게 시작한 다큐 영화 프로젝트가 발달장애 클라리넷 청년 연주단 드림위드앙상블을 다룬 <블랙 하모니>였다.
자폐 서번트 피아니스트 성호네 가족 이야기를 다룬 <녹턴>이 <블랙 하모니>의 출발점이었으니 <블랙 하모니> 또한 전적으로 독립 감독 손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쿄 독스 국제영화제 대상 수상 <블랙하모니>
작년 이 맘 때 나는 방송사 프로듀서로~
정감독은 독립제작사 디렉터로~
한 팀을 꾸려서 정부지원 사업 콘텐츠 해외유통 활성화 프로젝트로 선정되었다.
도쿄 독스 국제영화제에 참가했고, 첫 출전한 세계무대에서 한국팀으로선 이 대회 최초로 다큐 피칭 대상을 수상했다.
수상도 좋았지만 지역 공중파와 독립제작사의 협업 가능성을 증명한 자리여서 기쁨은 더 컸다.
블랙하모니에서 배운 것들
좋은 감독과 좋은 작품을 고르고 개발하는 능력이 프로듀서에게는 생존조건이라는 걸 절감했고~
국제 공동 제작비 펀딩에서 협업 모델 수립까지 너무나 많이 배웠다.
가장 큰 배움은 아직 지역 공중파는 이런 생경한 협업 마인드에 체질 전환이 느리다는 것이다. 독립제작사의 연출 감독과 제도권 방송사와의 상생 파트너십 협업 모델에 입각해 가보지 않은 길에 첫 발을 떼는 순간, 독립제작사를 하청업체쯤으로 다뤘던 방송사 내부의 관행으로 봤을 땐 회사 이익엔 둔감한 피디로 낙인찍힐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해외 영화제 대상 수상으로 받은 제작지원금 1천만 원을 <블랙하모니> 제작비에 투입하자 방송사 수익으로 잡지 않고, 외부 제작사로 제작비를 유출시켰다고 사내가 시끄러워졌다. 외주사 배불리는 수상 지원금이었고, 방송사엔 전혀 도음이 되지 않았다는 논리였다. 결국 감사까지 받게됐고,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다. 억울하지만 조직의 녹을 먹고사는 처지다 보니 그런 오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원받은 제작비와 집행 실비와의 차액으로 이익을 회사에 남겨주는 것 말고는 수익모델을 경험하지 못한 경험의 한계가 빚어낸 인식의 한계였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리스크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설득도 힘들었다.
그래서 그간 치열하게 달려왔던 <블랙 하모니>의 약진은 숨고르기를 하며 앞으로 숙제로 남았다.
이번 모스크바 영화제 대상을 거머쥔 정관조 감독의 다큐 영화 <녹턴>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과연 지역 방송사 시스템 안에서 정감독처럼 10년 동안 시간과 영혼을 갈아 넣어 저런 작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럼 우리 지역방송 피디는 뭘 할 수 있을까...?
*관련글: <녹턴>정관조 감독 모스크바 영화제 최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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